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나는 왜 집중력 가면을 쓰는가: 성인 ADHD의 우울과 고립을 넘어

by 호모 ADHD 2025. 8. 20.

 

어느 순간부터 나는 집중력을 한 가지 모자나 가면, 혹은 옷처럼 생각하기 시작했다. 필요에 따라 입고 벗는 것. 그 힘든 '연기'를 해내기 위해 나는 수많은 에너지를 쏟아붓는다. 그리고 그 연기의 소모는 결국 나를 우울이라는 감옥으로 몰고 간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나는 ADHD(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라는 진단명을 굳이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 진단 자체가 어렵고, 사회적 오해도 너무 많아서 일일이 설명하는 고된 피로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대신, 나는 이 가면을 쓰고 세상이 원하는 '정상'처럼 보이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내 성향은 흔히 '부주의 우세형'에 가깝다. 충동적이거나 과잉행동을 보이기보다는, 눈에 띄게 산만하고 주의가 분산되는 경향이 강하다. 이런 용어조차 성인이 되어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내가 그토록 절박하게 알고자 하지 않았다면 평생 모른 채 살았을 단어들이었다.

---

효율과 경쟁의 시대, 낙오자가 되는 두려움

우리가 사는 시대는 '효율'을 최우선으로 여긴다. 우선순위 선택과 집중, 그리고 업무 효율성으로 사람을 평가한다. 각종 소셜 네트워크와 언론에 나오는 '평균적인 삶'의 모습에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비주류가 되거나 낙오자라는 낙인이 찍히기 쉽다. 특히 한국 사회는 낙오자에게 유독 잔인하다. '정'을 말하지만, 그 이면에는 약자를 향한 혐오와 평균 이하를 향한 날카로운 시선이 존재한다. 이 시선은 칼날이 되어 내 감정을 찌르고, 그 두려움은 결국 우울과 고립으로 이어진다.

이 두려움은 더욱 깊어진다. 바야흐로 인공지능(AI)의 시대, 데이터가 곧 석유라 불리는 상황에서 내 '인적 데이터'가 오류로 인식되면 어떨까? 만약 기업들이 인적 자원을 사람이 아닌 AI에게 맡긴다면, 나는 '한국 인재상'에 맞지 않는 오류로 분류되어 서류 심사조차 통과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공포에 사로잡힌다. 그러기에 나는 나를 숨기고 세상이 원하는 인재상에 맞춰 이력서를 채워야 한다. 필요에 의해 없던 집중력까지 '만들어서' 살아가야 하는 이유다.

---

집중력 가면의 이면: 소진과 폭발의 반복

억지로 집중력을 만들어내는 데는 엄청난 에너지가 소모된다. 하루 종일 가면을 쓰고 집에 돌아오면 나는 시체가 되어버린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나의 뇌는 멈추지 않는다. 강제로 주의력을 사용하며 억눌렀던 '부주의함'의 에너지가 폭발하기 시작한다. 마치 산책과 엄청난 운동량이 필요한 반려견이 그 욕구를 충족하지 못할 때 미쳐 날뛰는 것처럼, 나 역시 때로는 걷잡을 수 없이 방황하거나, 혹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한 상태에 빠져든다.

사회라는 울타리가 길러낸 가축이 되어가는 것일까. 필요에 의해 재주를 부려야 하는 존재가 되는 것일까. 이런 잡다한 생각에 빠져 다시 시작되는 불면의 시간. 잠을 자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지만, 좀처럼 잠들지 못하는 나날들이 이어진다. 다음 날의 피로가 주는 공포가 몰려온다. 어른들의 말처럼, 사는 게 가장 힘들다는 것을 뼈저리게 이해하게 된다.

---

ADHD 뇌과학: 왜 억눌린 주의력은 폭발하는가

우리 뇌의 전두엽은 집중력, 계획, 충동 조절 등을 담당하는 핵심 부위다. ADHD를 가진 사람들은 이 전두엽의 기능이 일반인과 다소 차이가 있다. 특히, 주의력과 관련된 신경전달물질인 도파민노르에피네프린의 분비와 수용에 문제가 있어, 한 가지 일에 지속적으로 집중하기 어려운 경향을 보인다.

그런데 '집중력 가면'을 쓰고 억지로 주의를 기울이는 행위는 이 전두엽에 엄청난 과부하를 초래한다. 마치 저용량 엔진에 최고 속도를 내도록 강제하는 것과 같다. 이로 인해 뇌는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게 되고, 집에 돌아와 긴장이 풀리는 순간 억압되었던 부주의함이 통제력을 벗어나 폭발하는 것이다. 이는 단순한 피로를 넘어선 뇌의 '소진' 상태이며, 이 상태가 반복될수록 우울증과 같은 정신적 고통으로 이어질 확률이 높아진다.

---

ADHD, 고쳐야 할 '결함'인가, '다름'인가?

나는 이 모든 것을 고치려 하기보다, '모름을 모름으로서 인지하며' 살아가기로 했다. 남들과 다른 것이 아니라, 그 기준 자체를 거스를 수 있는 용기를 가지기로 했다. 겉보기에는 다를 게 없어 보일지라도, 후회하지 않을 용기로 나만의 길을 가기로 마음먹었다.

그 첫걸음이 바로 '나만의 에너지 발산법'을 찾는 것이었다. 나에게는 그것이 글쓰기였다. 이 글을 쓰는 시간은 마치 폭주하는 기차의 브레이크를 잡는 것과 같다. 단시간에 엄청난 양의 말을 글로 쏟아내고, 어찌어찌 정리해서 올리면 무언가를 해냈다는 성취감과 함께 다시 일어설 힘을 얻는다. 글쓰기는 나의 주의력을 한 곳으로 옮기는 힘이 되는 소중한 시간이다.

---

나를 위한 집중력 가면 사용 설명서

ADHD를 가진 우리에게 '집중력'은 선택이 아닌 생존의 문제다. 하지만 무작정 억지로 집중하는 것은 오히려 독이 된다. 나는 다음과 같은 나만의 '집중력 가면 사용법'을 익혀나가고 있다.

  • 나에게 맞는 집중력 도구 활용하기: '포모도로 기법(25분 집중, 5분 휴식)'처럼 짧은 시간 단위로 집중하는 연습을 하거나, 백색소음이나 클래식 음악을 들으며 주변의 산만함을 차단한다. 완벽하게 집중해야 한다는 강박을 버리고, '잠깐이라도 집중해 보자'는 마음으로 시작한다.
  • 물리적 환경 바꾸기: 핸드폰을 멀리 두고, 책상 위를 깨끗하게 정리하는 것만으로도 주의 분산 요인을 크게 줄일 수 있다.
  • 에너지 재충전 시간 확보: 억눌린 에너지를 건강하게 해소하는 나만의 방법을 반드시 만들어야 한다. 나에게는 글쓰기였지만, 누군가에게는 산책, 운동, 악기 연주 등이 될 수 있다.
  • 자신에게 솔직해지기: 모든 사람에게 ADHD를 설명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신뢰하는 몇몇 사람에게는 나의 어려움을 솔직하게 털어놓고 도움을 요청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이는 고립감을 줄이는 가장 중요한 방법이다.
---

결국 나는 나를 받아들이는 용기를 얻었다

나는 ADHD를 평생 안고 가야 할 '결함'이 아닌, 나의 일부이자 삶의 특성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남들과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다른 속도로 살아가는 나 자신을 사랑하기로 했다.

오늘도 나는 이렇게 하루 중 일부를 글을 쓰는 자아로 살았다. 그리고 이제 다시 집중력의 가면을 쓰고 사회의 일원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이 글을 읽는 당신도 혹시 나와 같은 가면을 쓰고 있다면,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기억했으면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고치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고 함께 살아가는 용기'다.

당신은 어떤 가면을 쓰고 있나요? 그리고 그 가면을 잠시 벗어두고 온전한 자신으로 돌아갈 수 있는 당신만의 시간은 언제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