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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시간 속에 살 것인가? 숫자가 아닌 중력의 모래알, 하루 속 유일한 통제의 시간

by 호모 ADHD 2025. 8. 28.

모레시계, 이 공간 두번째 시간을 표현하는 물건

 

 

우리는 모두 시계를 본다. 손목의 스마트 워치, 책상의 디지털시계, 심지어는 스마트폰 화면까지. 그 안의 숫자는 끊임없이 변화하며 우리를 재촉한다. "지금 몇 시야?", "벌써 이렇게 시간이 지났네." 이처럼 시간은 늘 우리를 쫓는 존재이자, 그 속에서 무언가를 '해내지 못한' 우리를 자책하게 만드는 비수와도 같다. 효율을 따지고, 생산성을 강요하는 사회 속에서 우리는 시계의 노예가 되어버렸다.

최근 나는 이런 삶에 작은 반란을 일으켰다. 평소 소비를 즐기지 않는 내가 덜컥 '모래시계'를 구매한 것이다. 이유는 단순했다. 나의 공간에서만큼은 숫자에 쫓기지 않고, 온전히 나의 시간을 살고 싶었기 때문이다. 직장에서, 사회생활에서, 혹은 어떤 행동을 할 때든 나는 늘 숫자로 적힌 시계를 보며 쫓기는 사람이었다. 그 시간 속에서 효율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그런 현실을 부정하듯 스스로를 무너뜨리는 자책이 너무 많았다. 그래서 손안에 늘 전자기기를 가지고 다니니, 나의 공간에서만큼은 시계를 없애자는 생각으로 생활을 보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시계 불안증'에 시달렸다. 지금이 몇 시일까, 벌써 이만큼 시간이 지나버렸네, 하며 계속 휴대폰 시계를 확인했다. 하지만 일주일쯤 지나자 무언가 해방감이 들었다. 기상 후 루틴화된 일상 속에서 때로는 시간이 엉망이 되기도 했지만, 웬만해서는 내 생각 안에서 시간을 사용할 수 있었고, 주변의 큰 변수만 없다면 내 시간을 지킬 수 있었다. 어쩌면 내 공간에서만큼은 내 시간도 통제가 가능할 것이라는, 어찌 보면 말도 안 되는 믿음을 가지며 생활을 하고 있다.

이 모래시계가 좋은 점은 가끔 집중을 요구하는 일을 할 때 진가를 발휘한다는 것이다. 어떤 문제를 해결하고자 나의 모든 집중력을 끌어올려야 할 때, 나는 모래시계를 뒤집는다. 이 시간만큼은 오직 이 문제에만 매달리겠다고 다짐하며. 물론 1분도 채 안 돼서 내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ADHD) 성향이 나를 무너뜨리기도 한다. 그러나 3초도 버티지 못하던 아이가 1분은 버틴다면, 그건 꽤나 성장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훈련을 한다. 단, 이때 조심해야 할 것은 해결해야 하는 문제를 너무 많이 만들지 않는 것이다. 즉, 모래시계를 통한 해결은 제약을 걸어두고, 나만의 원칙이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원칙과 훈련으로 만들어진 시간은 나에게 큰 힘으로 다가오고 있다.

현재 나는 이런 글을 쓰거나, 해결이 안 되는 문제가 발생해 무언가를 읽거나, 혹은 강제적으로 생존 독서를 위해 시간을 내야 할 때 모래시계를 돌린다. 이 '돌린다'는 행위 하나가 주는 통쾌함과 해방감은 무언가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 상징이 되었다. 바로 오늘 내가 말하고 싶었던 부분이 이것이다. 나의 시간의 자유는 내가 선택하고,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우리는 어느 순간부터 생각보다 너무 많은 영향력으로부터 나의 시간을 지켜야 했다. 시간 선택의 자발적인 자유보다는 수동적인 경우가 너무나 많다. 즉, '나'라는 약자가 가장 취약한 것은 어쩌면 '시간'이었는지 모른다. 그래서 나는 인간의 자유 중 하나인 시간 선택의 자유를 찾으려는 노력을 하고 있고, 그 시작이 바로 이 모래시계인 것이다.


중력의 모래알이 선사하는 '나만의 시간'

시간에 쫓기는 노예 되지 말고 시간을 지배하라 [출처:중앙일보] https://www.joongang.co.kr/article/21382818

 

단순히 중력에 의해 떨어지는 모래알이 어쩔 때는 아주 무섭게 달려든다. 나를 향한 주의력 사냥꾼들의 어떠한 유혹 속에서도 정신 차리라고, 떨어지는 만큼의 시간을 빼앗기지 말라고 말이다. 어쩌면 어린 시절에 읽은 미하엘 엔데의 소설 『모모』에 등장하는 '회색 신사'의 시가가 지금 나에게는 이 모래시계인 걸까. 회색 신사들은 사람들의 시간을 훔쳐서 살아가는데, 그들이 훔친 시간은 숫자로 환산되어 쌓이고, 사람들은 시간을 잃은 채 쫓기듯 살아간다. 나를 쫓던 디지털 시계의 숫자는 어쩌면 회색 신사들이 훔쳐간 내 시간의 흔적이었을지도 모른다.

모래시계를 사용하는 순간, 나는 '시간의 창조자'가 된다. 정해진 숫자에 나를 맞추는 것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시간의 양을 모래알로 채우고 그 안에서 온전히 나 자신에게 집중한다. 이 시간만큼은 내가 나에게 주는 선물이라고 생각하며 최대한 아껴 쓴다. 단순히 모래가 떨어지는 것을 보는 행위만으로도 나의 뇌는 '지금 이 순간, 이 일에 집중해야 한다'는 신호를 받는다. 이는 마치 심리학에서 말하는 '단일 작업(single-tasking)'의 효과와도 같다. 멀티태스킹이 효율적이라는 믿음과 달리, 한 번에 한 가지 일에만 집중하는 단일 작업은 오히려 높은 생산성과 깊이 있는 사고를 가능하게 한다. 모래시계는 바로 그 단일 작업을 위한 물리적 매개체인 셈이다.

모래시계 속 시간은 정확한 분 단위로 떨어지지 않는다. 어떤 날은 모래가 조금 빠르게, 어떤 날은 조금 느리게 흐르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는 시간의 상대성을 경험하게 한다. 무언가에 깊이 몰입할 때는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가고, 지루할 때는 더디게 흐르는 것과 같은 이치다. 모래시계는 이런 '주관적인 시간'을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이는 우리가 숫자 시간에 갇혀 경험하지 못했던, 오롯이 나의 감각에 집중하는 경험을 선사한다.


시간 통제의 해방: 삶의 주체성을 되찾는 여정

우리는 끊임없이 외부의 요청과 자극에 의해 시간을 쪼개어 사용한다. 스마트폰 알림, 업무 요청, 타인의 부탁 등 수많은 요소들이 우리의 시간을 잠식한다. 이런 삶 속에서 모래시계는 '경계(boundary)'를 만들어주는 도구 역할을 한다. 모래시계를 돌리는 순간, 나는 세상의 모든 방해로부터 나를 보호하는 방패를 들어 올린다. 이 시간 동안은 오직 나에게만 집중하겠다는 선언이며, 동시에 타인에게 나의 시간을 침범하지 말아 달라는 무언의 신호이기도 하다.

「미니멀리즘」의 관점에서 보면, 모래시계는 시간의 불필요한 낭비를 줄이고 핵심적인 것에 집중하게 만드는 미니멀한 도구다. 우리가 디지털 기기를 통해 끊임없이 소비하는 '시간 도둑'들을 차단하고, 가장 중요한 일에 나의 에너지를 쏟게 만든다. 이는 궁극적으로 '삶의 주체성'을 되찾는 과정이다. 내 삶의 주인이 내가 되는 것, 그리고 그 시작은 바로 내 시간을 내가 통제하는 것에서 비롯된다.

이 작은 모래시계가 나에게 주는 새로운 해방감에 취해 오늘도 나는 내가 돌린 만큼의 시간 속에서 나에게 처한 문제를 해결하려 애쓴다. 이 시간은 나의 통제 아래 있으며, 온전히 나를 위한 선물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나는 나를 깎아내리던 자책의 비수를 멈추고, 나라는 존재를 다독이며 성장해 나간다. 중력의 힘으로 떨어지는 저 모래알들은 단순한 모래가 아니다. 그것은 나의 집중력이며, 나의 의지이며, 나의 자유다. 모래시계는 나에게 묻는다. '당신은 어떤 시간 속에 살고 싶은가?' 그리고 나는 답한다. '나는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시간 속에서 살고 싶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