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가오는 6.3 대선은 대한민국 유권자들에게 중대한 선택의 순간을 제시합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정치적 무력감과 지식의 부족으로 인한 불안감을 호소하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습니다. 이는 마치 우리가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에서 만났던 혼란스러운 고려 말,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기 어려웠던 백성들의 고민과 놀랍도록 닮아 있습니다. 본 글은 이러한 유권자의 심리를 '육룡이 나르샤'의 서사에 투영하여 분석하고,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모색하고자 합니다.
1. 무지의 그림자: 난세의 백성과 현대 유권자
'육룡이 나르샤'는 격변의 시대 속에서 새로운 국가 건설을 꿈꾸는 인물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이 드라마에서 특히 주목할 점은 신분이 낮고 배움이 부족했던 백성들의 질문입니다. "단지 시키는 것을 할 것인가?", "시대의 흐름, 난세의 흐름을 따를 것인가?", "그뿐이고 그러면 되는 것인가?" 이러한 질문들은 현대 사회의 유권자에게도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킵니다.
많은 유권자는 자신이 아는 것이 부족하다는 '무지'를 인정합니다. 이러한 무지는 정치적 의사결정 과정에서 불안감과 불편함을 야기합니다. 선거철이 되면 쏟아지는 방대한 정보와 풍문 속에서, 대중은 진실을 가려낼 힘을 상실하고 종종 자존심만 앞서 풍문에 흔들리거나, 특정 흐름에 휩쓸려 무비판적인 목소리를 내기도 합니다. 과연 이러한 태도가 진정한 민주시민의 모습이라 할 수 있을까요? 정치적 이슈를 단순히 가십거리로 소비하며 하루를 살아가는 모습은, 난세 속에서 나라의 큰 흐름을 그저 수동적으로 받아들였던 백성들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이러한 무지와 정치적 무관심에 대한 고민은 콜린 헤이(Colin Hay)의 『우리는 왜 정치를 싫어할까?(Why We Hate Politics)』에서 깊이 있게 다루어집니다. 헤이는 현대 민주주의 국가에서 나타나는 정치적 환멸의 원인을 추적하며, "우리의 정치에 대한 기대와 실제 정치 현실 간의 괴리가 어떻게 형성되는지"를 분석합니다. 그는 "정치 행위자에 투영하는 인간 본성에 대한 가정이 정치적 환멸을 결정적으로 형성한다"고 지적하며, 단순히 정치에 대한 '혐오'를 넘어선 근원적인 원인을 탐구합니다. 이 책은 정치적 무지에서 비롯된 무력감이 개인의 감정을 넘어선 사회 구조적 문제임을 시사합니다.
2. 책임의 무게: 위선인가, 지켜야 할 가치인가
'육룡이 나르샤' 속 인물들은 각자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때로는 위선적인 선택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러한 선택이 단순한 개인적 이익을 위한 위선이 아니라, 더 큰 대의를 위한 '책임감'에서 비롯된 것인지에 대한 성찰입니다. 현대 유권자에게도 "나는 어떤 것을 지킬 것인가?"라는 질문은 중요합니다. 무엇이 진정 지켜야 할 가치인지, 그리고 그것을 지키기 위한 용기와 지식이 자신에게 있는지를 자문해야 합니다.
대선 후보들의 공약과 비전을 평가하는 과정에서, 유권자들은 그들의 진정성을 헤아릴 수 없는 난관에 봉착합니다. 후보의 일생, 정치적 입장, 과거 발언과 현재의 행보를 깊이 이해하지 못한 채 표를 던지는 것은 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드는 행위일 수 있습니다. 단지 '사는 게 너무 힘들어서' 막연한 변화를 기대하며 투표하는 행위는, 선거가 삶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지 못한다면 무관심한 개인으로 살아가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회의감으로 이어집니다. 투표가 단순한 의무 이행을 넘어선 진정한 의미를 가지기 위해서는, 유권자 스스로의 주체적인 판단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아람 허(Aram Hur) 교수의 『시민 의무의 서사: 아시아의 국가 서사가 민주주의를 어떻게 형성하는가(Narratives of Civic Duty: How National Stories Shape Democracy in Asia)』는 이러한 시민의 책임감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을 제공합니다. 이 책은 "시민들이 왜 투표하고, 세금을 내고, 국가를 위해 행동하려는 의무감을 느끼는지" 탐구합니다. 특히 아시아 민주주의 국가의 사례를 통해 "국가적 서사가 시민 의무를 형성하는 방식과 민주주의의 회복력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합니다. 허 교수는 "민주주의 퇴행에 직면했을 때, 민주적 가치를 우선시하는 평범한 시민들이 어떻게 이를 막을 수 있는지"에 대해 강조합니다. 이 책은 투표 행위가 단순히 한 표를 행사하는 것을 넘어선 공동체에 대한 책임 의식에서 비롯되어야 함을 역설합니다.
3. 지식에 대한 갈망: 백성의 질문, 유권자의 물음
'육룡이 나르샤'에서 무명이나 척사광 같은 강대한 세력, 혹은 이방원, 정도전 같은 뛰어난 책사들 앞에서 백성들은 종종 무력했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 일부는 "이것이 옳은가?",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와 같은 근원적인 질문을 끊임없이 던졌습니다. 이는 단순한 생존 본능을 넘어선, 인간으로서 마땅히 가져야 할 주체적인 사고의 발현이었습니다.
오늘날 유권자 역시 "무엇을 읽어야 하고, 무엇을 알아야 하며, 어떤 공부를 해야 하는가?"라는 갈증을 느낍니다. 단지 벌고 소비하며 하루를 살아가는 삶이 전부인지에 대한 의문은 깊어집니다. 책임감 없이 허공에 떠도는 인터넷 공간의 말들로는 결코 충분한 변화를 만들어낼 수 없다는 인식 또한 커지고 있습니다. 다가올 대선은 이러한 무지의 불안감을 더욱 증폭시킵니다. 어떤 대통령의 시대에서 살게 될 것인지, 그리고 그 리더십 아래에서 우리는 어떤 방향성을 가지고 살아가야 할 것인지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지식에 대한 갈망은 더욱 커지고 있습니다.
선조 시대의 유학자 율곡 이이(李珥) 선생의 『격몽요결(擊蒙要訣)』은 무지에서 벗어나 배움의 길로 나아가고자 하는 이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어리석음을 깨우치는 비결'이라는 뜻의 이 책은 "젊은이들이 학문에 입문할 때 필요한 마음가짐과 구체적인 학습 방법"을 제시합니다. '입지(立志)'부터 '처세(處世)'에 이르기까지, "학문의 시작은 올바른 뜻을 세우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가르침은 현대 유권자들이 정치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자 할 때도 유효합니다. 즉, 단순히 정보를 습득하는 것을 넘어, 삶의 방향과 가치를 정립하는 데서부터 진정한 앎이 시작된다는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4. 변방의 한량인가, 주체적인 시민인가
만약 누가 대통령이 되든 개인의 삶이 똑같다는 인식이 지배적이라면, 이는 유권자 스스로를 '변방의 한량'으로 전락시키는 결과를 낳을 수 있습니다. '육룡이 나르샤' 속 많은 백성들이 권력 교체와 시대 변화 속에서도 고단한 삶을 이어갔듯이, 정치적 무관심은 개인의 삶을 외부의 영향에 더욱 취약하게 만듭니다.
하지만 드라마 속에는 작은 깨달음 하나로 삶의 방향을 바꾸려 했던 인물들도 존재했습니다. 정도전의 민본 사상에 공감하거나, 이성계의 대업에 동참하며, 혹은 이방원의 현실 인식을 따르며, 그들은 비록 미미할지언정 역사의 한 조각을 만들어갔습니다. 이는 유권자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단순히 주어진 것을 수동적으로 수용하는 존재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자신의 삶의 주체성을 되찾기 위해 노력할 것인가? 이 질문은 단순한 정치적 선택을 넘어선 삶의 태도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을 요구합니다.
이러한 역사적 변동 속에서 개인의 역할과 삶의 의미를 탐색하는 데에는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와 같은 작품이 깊은 영감을 줄 수 있습니다. 이 소설은 5.18 광주 민주화운동이라는 격동의 현대사 속에서 "평범한 개인이 겪는 비극과 저항, 그리고 그 이후의 삶"을 생생하게 그려냅니다. 작품은 "개인의 고통과 상실이 거대한 역사적 사건과 어떻게 얽히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으로서 무엇을 지켜내려 하는지" 묻습니다. 이처럼 역사의 큰 흐름 속에서 개인이 감당해야 할 무게와 그럼에도 주체성을 잃지 않으려는 노력을 이해하는 것은, 우리가 어떤 유권자로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답을 찾는 데 중요한 통찰을 제공할 것입니다.
5. 무지를 넘어서는 용기: 지식과 성찰의 길
'육룡이 나르샤'에서 배움이 짧았던 백성들이 가졌던 질문은 단순히 시대의 혼란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본능적인 물음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마땅히 추구해야 할 진리와 주체성에 대한 갈망이었습니다. 정도전이 새로운 나라를 꿈꾸며 민본 사상을 강조했듯, 현대의 민주시민 역시 단순히 투표권을 행사하는 것을 넘어, 자신의 삶과 사회에 대한 깊은 이해와 통찰을 바탕으로 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지식의 축적이 필수적입니다. 특정 서적만을 지칭하기보다, 역사를 통해 과거를 성찰하고, 철학을 통해 사유의 깊이를 더하며, 다양한 분야의 지식을 섭렵하여 세상의 복잡성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뉴스 헤드라인이나 SNS의 단편적인 정보에만 의존하기보다, 비판적 사고와 깊이 있는 탐구를 통해 자신만의 견해를 정립해야 합니다.
물론, 단기간에 모든 것을 알게 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무지는 여전히 우리를 따라다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무지의 불안감 속에서 멈춰 서지 않고, 끊임없이 배우고 질문하는 자세를 갖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난세 속의 백성과 다름없던 존재가, 스스로의 삶을 책임지고 능동적으로 살아가는 민주시민으로 거듭나는 첫걸음입니다. 다음 대통령의 시대 속에서 우리가 어떤 방향성을 가지고 살아갈지는 결국 우리 스스로의 지식과 성찰, 그리고 참여의 깊이에 달려 있습니다. 누가 대통령이 되든 삶이 똑같다는 변방의 한량적 체념이 아닌, 시대의 흐름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찾아나서는 주체적인 삶을 지향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