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00씨는 피곤하겠어, 결과가 좋긴한데 너무 오래 일하잖아"
이 말은 훈장처럼 나를 따라다닌다. 남들이 보기엔 비효율적이고 답답해 보이는 나의 일하는 방식, 그것은 '일머리'가 둔하고 산만함으로 늘 고생했던 내가 스스로 터득한 유일한 생존 전략이었다. 우연한 기회에 '강사'라는 직업을 갖게 되었을 때, 나는 끊임없이 의문을 던졌다. 사람들과의 관계도 서툴고, 단체 생활도 어려운 내가 누군가를 가르친다니. 과연 옳은 길일까?
하지만 나에게는 고등학교 때부터 쌓아온 몸으로 부딪히는 노동의 노하우가 있었다. 잘하지 못하면 열심히, 그 열심히를 넘어서 절실하게 하자. 결과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될 때까지 그냥 계속하는 것이다. 이 얼마나 비효율적이고 우직한 방식인가. 그래도 나에게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기꺼이 택한 불편함, 그리고 따가운 시선
물론 그 과정에서 동료들과 상사들의 따가운 시선을 피할 수 없었다. "00씨 때문에 내가 일을 안 하는 사람 같잖아요," "혼자 일 다 하는 줄 알겠네," "눈치 보여서 어디 쉬겠나?" 같은 말들이 쏟아졌다. 미안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들처럼 효율적으로 쉬어가며 일하기에는 나의 능력과 성향이 너무도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덜 먹고, 덜 자고, 더 일하는 방법밖에는 몰랐다. 편안함을 내던지고 불편함 속에서 버티는 것. 답은 오히려 단순했다. 오직 내가 내야 하는 '결과'에만 집중하는 것.
하지만 이 단순한 삶은 때로는 긴 호흡의 지루함으로 이어진다. 언제 나올지 모르는 결과를 위해 끊임없이 무언가를 바라보고, 때로는 부산스럽게 움직이지만 때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생각만 해야 할 때도 있다. 그 속에서 예상치 못한 어려움은 끝없이 등장한다. 나는 이 지루함 속에서 한 저자의 '순록 사냥' 이야기에서 깊은 공감을 얻었다. 오지의 극한 환경과 나의 일상을 비교할 순 없지만, 그 흐름만큼은 너무나도 비슷하다고 느꼈다.
그토록 기다리던 순록 사냥이 끝났는데도 끝이 아니었다. 사냥한 순록을 이고 지고 다시 그 긴 시간을 걸어야 했다. 찰나의 성취감은 곧바로 피로로 묻혔고, 아침에는 전날의 피로가 온몸을 덮쳤다. 식량이 바닥나면 또다시 다음 결과를 위해 긴 기다림, 아무것도 아닌 지루함의 시간 속으로 스스로를 던져 넣어야 한다.
난독과 산만함이 준 뜻밖의 선물
사람들은 내게 묻는다. "그 재미없는 생활을 어떻게 계속해?", "지루하지 않아?" 하지만 그들은 잘 모른다. 나는 내 삶에 지루함을 느낀적이 거의 드물다 못해 없다. 난독과 ADHD적 읽기가 주는 최고의 단점이자 장점은 무엇일까. 그것은 기억하고자 해도 잘 기억하지 못하고, 이미 읽었던 것임에도 마치 새롭게 다가와 늘 흥미를 유지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읽다가도 스스로의 망상에 사로잡히고, 몸이 근질거리면 산책하고, 뛰고, 다시 일한다. 그러다 보면 집은 아수라장이 되는데도 '그러려니' 살 수 있다. 공적인 영역에서는 결벽에 가까운 가면을 쓰고 깔끔하게 지내지만, 사적인 나의 공간은 내 모습 그대로의 혼돈이다. 이런 혼란도 없을 것이다. 잠시 딴길로 샜지만,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자면 이 책은 나에게 큰 위로와 힐링으로 다가왔다.
불편함의 정글 속, 나의 발버둥
나와 같이 불편함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효율보다는 몸빵을 택하고, 긴 기다림 끝에 찾아오는 작은 성과에 만족하는 나에게 이 책은 깊은 울림을 주었다.
'불편함을 즐기자'라는 좌우명 속에서 나는 이 정글 같은 한국의 경쟁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오늘도 발버둥 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내게 속삭인다. "꾀병 부리지 마. 적어도 감자 하나를 위해 땅을 1m나 파지 않아도 되고, 편안한 잠을 위해 땅이 고른 곳을 찾아 몸을 움직이지 않아도 되잖아. 숨만 쉬어도 400kcal를 쓰지 않아도 된다고."
나는 이 덤덤한 위로에 만족하며 또다시 나의 전쟁터를 향한다. 이제는 강사가 아닌 다시 현장에서 몸을 써야 하는 하나의 부품적 노동자로서.